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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알못’ 기자의 남산 나들이

  • Editor. 여지훈 기자
  • 입력 2022.09.2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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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운뉴스 여지훈 기자] “기차가 빨라, 비행기가 빨라?”

“미국이 커, 중국이 커?”

“군인이 세, 경찰이 세?”

한창 세상의 많은 것들을 비교하고 단순화시켜 이해를 넓혀가던 어린 시절, 기자의 입에는 늘 이런 질문들이 붙어 다니곤 했다. 그때는 기차도 빨라 보였고 비행기도 빨라 보였지만, 실제로 무엇이 더 빠른지는 남이 말해줘야 알 수 있던 시절이었고, 나라 간 비교에도 땅 면적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가 여럿 있다는 걸 알 턱이 없던 나이였다.

“63빌딩이 높아, 남산타워가 높아?”

지칠 줄 모르던 비교 욕구는 여지없이 국내 최고(最高) 건물이 무엇이냐는 호기심으로까지 이어졌고, 어느 날 기자는 어머니께 이런 질문을 드렸다.

남산타워는 서울에 있는 그 어떤 랜드마크보다도 높이 있다. 사진은 남산타워의 모습. [사진=여지훈 기자]
남산타워는 서울에 있는 그 어떤 랜드마크보다도 높이 있다. 사진은 남산타워의 모습. [사진=여지훈 기자]

지금이야 서울에만도 롯데월드타워, 파크원 등 여러 마천루가 들어섰지만, 2002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단연 63빌딩이었다. 그런데 그보다도 전인 1990년대 중반, 또래 중 누군가가 남산타워가 더 높다고 반박 의견을 제시했던 듯싶다. 확고부동한 마음으로 1위로 믿어 의심치 않던 63빌딩이 2위로 밀려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기자는 곧바로 어머니께 질문을 던졌고, 그 치기 어린 질문에 어머니는 현답(賢答)을 주셨다.

“건물 높이만 따지면 63빌딩이 더 크지만, 남산타워가 세워진 남산 높이까지 더하면 남산타워가 더 높지.”

어머니의 대답은 그때까지 모 아니면 도라는 식, 그러니까 세상을 이분법적으로만 이해하던 기자의 가치관에 큰 충격을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야! 정정당당히 재야지, 단상에 올라가서 키를 재는 게 어딨어?!”

사람이라면 으레 이런 반박도 나올 법하지만, 63빌딩도 남산타워도 모두 부동산이다. 천지가 개벽하지 않고서야 건물이 스스로 움직일 리 없으니, 단순히 고도의 비교라면 지금 있는 각자의 위치에서 비교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남산타워는 63빌딩, 아니 서울에 있는 그 어떤 랜드마크보다도 키가 큰 셈이다.

이후 30여년이 흐르는 동안 수십 차례 서울을 방문했고, 또 지금은 아예 서울에 적을 두며 살고 있지만, 종종 행사나 관광 등의 이유로 찾았던 63빌딩과 달리 남산타워는 먼발치에서나마 스치듯 보고 지나쳤을 뿐 직접 찾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중 평소 여행을 자주 다녀 서울 지리 곳곳을 꿰뚫고 있던 동료 기자의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고, 때마침 지방에 사는 벗이 서울을 구경하러 올라온다고 해서 큰맘 먹고 남산타워를 방문키로 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남산타워에 가기로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아 충무로역 근처 남산골한옥마을을 가고 싶다던 벗을 위해 어엿한 서울시민으로서 손색없는 안내를 도맡고자 경로를 탐색하던 중, 멀잖은 곳 남산 중턱에 있는 한양도성 유적지 전시관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왕 가는 거 전시관도 함께 들러야겠다고 계획을 짠 게 화근(?)이었다.

서울 중심부에 있는 남산의 이름은 본래 인경산. 그러나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풍수지리에 따라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한양)로 옮긴 뒤부터는 도성의 남쪽에 있는 산이란 의미로 ‘남산’으로 불렸다. 당시 남산에는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자 목멱대왕 산신을 배향하던 목멱신사가 있었고, 이에 목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목멱신사가 도성의 남산 꼭대기에 있고 소사로 제사 지낸다”는 말이 나오며, 이 목멱신사를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사당이란 뜻으로 ‘국사당’으로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남산 중턱에 신궁을 세우면서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는 목멱신사를 못마땅히 여겨 옮길 것을 강요했고, 이에 신사는 현재의 인왕산 국사당 자리로 이전했다.

남산타워에서의 풍광 [사진=여지훈 기자]
남산타워에서의 풍광 [사진=여지훈 기자]

그리 높지 않다고 한들 남산도 산이었다. 당연히 오르막이 있었고, 그날 아침까지 내린 비로 습해진 날씨는 길을 오르는 이의 등을 금세 땀으로 축축이 적시기 시작했다. 습기에 늦더위까지 겹쳐 불쾌지수가 한껏 치솟자 이틀 전만 해도 불었던 선선한 가을바람이 새삼 그리워졌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한창 움직이던 중에 멈추면 땀이 더 나는 법이다. 그래서 전시관을 도로 하나 앞두고 건널목에 멈춰 기다릴 그 짧은 시간마저 피하고 싶었던 기자와 벗은 무심코 직진만 고수했고, 그러다 보니 웬걸, 어느새 남산타워가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어라, 타워까지 금방이겠는데? 이왕 온 거 높은 곳에서 서울 경치나 보고 가는 게 어때?”

그렇게 내친걸음을 이어가다 보니 뜻하지 않게 도착한 곳이 바로 계획에도 없던 남산타워였다. 오르는 동안 통기성 좋은 옷을 갖춰 입고 빠른 걸음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자주 곁을 스쳐 갔는데, 굳이 관광객이 아니라도 근처 주민들에겐 좋은 운동코스로 자주 애용되는 듯싶었다.

바로 밑에서 올려다본 남산타워는 47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크고 늠름했다. 전망대가 완공된 게 1975년이었고, 애초 설계대로 전망대 없는 송신탑 형태로 준공된 것이 1971년이었으니 그 기간까지 셈하면 51년, 족히 반백 년이 넘은 셈이었다. 탑신과 철탑이 각각 135.7m와 101m로 둘을 합치면 236.7m니, 높이 249.6m인 63빌딩보다 조금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243m인 남산의 높이를 더하면 남산타워 정상의 해발고도는 479.7m에 이른다.

남산타워를 소개하는 글에 따르면, 남산타워는 국내외 관광객이 즐겨 찾는 서울 제1의 관광명소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지는 확실치 않으나, 실제로 내국인뿐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외국인이 타워를 방문하는 걸 목격하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남산타워의 웅장함에 감탄한 것도 잠시, 무엇보다 시원한 바람과 청량한 음료가 절실했던 기자는 주위부터 훑었고, 금세 남산타워 바로 밑에 자리한 서울타워플라자 1층에서 익숙한 상호를 발견했다. 이젠 서울 도심을 돌아다닐 때 보이지 않으면 섭섭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브랜드, 바로 스타벅스였다. 국내에서 커피전문점 브랜드로는 꾸준히 1위를 유지 중인 스타벅스가 목마른 남산 순례자를 위해서도 어김없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반가움과는 별개로 그 탁월한 위치 선정에 잠시나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산타워에서의 풍광 [사진=여지훈 기자]
남산타워에서의 풍광 [사진=여지훈 기자]

시원한 커피와 음료를 두 손 들고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울타워플라자 5층으로 올라갔다. 5층과 연결된 넓은 야외 광장은 앞뒤로 환히 트여 있어, 유료티켓을 구매해야 입장이 가능한 전망대를 꼭 가지 않더라도 남산을 방문한 이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서울 풍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내려다본 서울 도심은 푸른 하늘 아래 옅은 수증기에 감싸여 있었다. 그토록 큼직했던 빌딩도 남산 위에서는 작은 성냥갑에 불과할 뿐이었고, 그래서였을까, 저 아래 몇 평 남짓한 방구석, 좁은 사무실에서 하루하루 그토록 치열히 보내온 어제까지의 삶이 문득 부질없게만 느껴져 절로 실소가 나왔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게 비단 기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찍이 조선 후기에 ‘발해고’를 썼던 유득공은 남산에 올라 ‘춘성유기(春城遊記)’를 남기며 다음과 같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남산 높은 곳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성안의 기와집들은 마치 거무스레한 밭을 새로 갈아엎은 것 같고, 큰길을 오가는 행인들은 마치 긴 개울물이 들판을 꿰뚫고 굽이쳐 흐르는 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들 같았다.

성안의 호구가 8만이라 하는데, 그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웃고, 울고, 노래하고, 마시고, 장기 두고, 바둑 두고, 남을 칭찬하고, 비방하는 등 무슨 일을 하거나 하려 하거나 하는 사람들을 이 높은 곳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남산타워에서의 풍광 [사진=여지훈 기자]
남산타워에서의 풍광 [사진=여지훈 기자]

그렇게 한동안 서울 시가지를 내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광장을 둘러싼 철제 울타리에 셀 수조차 없는 수많은 자물쇠가 걸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연한이 족히 수십 년은 지났는지 짙은 갈색으로 변색된 녹슨 자물쇠부터 반짝이는 광택을 자랑하는 갓 달린 자물쇠에 이르기까지, 실로 자물쇠의 천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울타리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 모두가 서울 도심을 조망하며 한결같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을 숱한 연인들의 흔적일 게 틀림없었다.

때로 빛바랜 낡은 자물쇠 주위로는 퀴퀴한 냄새가 맴돌았는데, 세대를 달리하며 오랜 세월 닳아 없어졌을 그 징표의 부식이, 젊은 날 불꽃같이 타올랐다가 차츰 스러져갔을 뭇 연인들의 사랑의 일대기, 그것의 완벽한 비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야경이 그토록 장관이라곤 하나, 아직 갈 길이 남았기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아쉬움을 달래며 내려오는 길은 오르막에 비해 한결 수월했다. 그사이 서쪽으로 크게 치우쳐 내린 태양이 낮게 쏘아 보낸 빛살은 즐비하게 늘어선 나무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기 버거워했고, 그래서인지 산 공기도 크게 낮아져 땀도 거의 나지 않았다. 간혹 길 중간마다 ‘커브에서 사망사고가 잦으니 속도를 줄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어김없이 도로를 질주해 내려가는 경기용 자전거를 탄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경고의 엄중함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남산 중턱 대로변까지 걸어 내려온 뒤 택시를 불렀고, 본래 목적지였던 남산골한옥마을로 곧장 향했다. 오를 때는 그토록 지난하게만 느껴지던 길을 어찌나 쉬이 내려가던지, 이래서 다들 번잡한 교통체증을 감수하면서도 차를 몰고 다니는구나 싶었다.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배를 채우고 나오자 주위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있었다. 잔잔한 조명 빛에 고즈넉이 밝혀진 한옥마을 정문은 먼 뒤에서 형형색색 변하는 남산타워의 현대식 자태와 묘하게 대조되면서도 사뭇 잘 어울렸다.

남산골한옥마을 전경 [사진=여지훈 기자]
남산골한옥마을 전경 [사진=여지훈 기자]

남산골한옥마을은 1989년 수도방위사령부로부터 토지를 매입해 서울 시내에 퍼져 있던 한옥 다섯 채를 이전 또는 복원해 한데 모아 만든 공간이다. 1998년 4월 개관했으며, 사대부 가옥부터 서민 가옥까지 당대의 생활방식을 한자리에서 보기 쉽도록 집은 물론 살던 이들의 신분에 걸맞은 가구들까지 예스럽게 배치한 게 특징이다.

모아놓은 다섯 집은 각각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의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의 가옥, 관훈동 민씨의 가옥, 옥인동 윤씨의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재실이며, 또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 기념상품이 전시된 전통공예관, 전통 연극, 놀이, 춤 등 옛 문화를 접하며 체험할 수 있는 서울남산국악당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전통조경 양식으로 조성된 계곡과 정자, 화초가 정원을 꾸미고 있으며, 한옥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는 1994년 당시 시민 생활과 서울시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담은 보신각종 모양의 타임캡슐이 매설돼 있다. 타임캡슐은 400년 후인 2394년에 후손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다만 기자와 벗은 너무 늦은 시간 방문한 탓에 그 모든 곳을 들러 구경하기보다는 고즈넉한 정취만 잔뜩 만끽하다 왔다.

장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니 때마침 예정된 공연이 끝났는지 국악당에서 공연자들이 왁자지껄 몰려나오고 있었다. 저녁 하늘 아래 까르륵거리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적적한 밤공기를 유쾌히 적시며 퍼져나갔다. 그들을 따라 한옥마을 정문 문턱을 나올 즈음, 함께 간 벗이 “바쁘고 힘들었지만 참 알차고 보람찬 하루였어”라며 반나절 동안 이어진 짧은 서울여행의 솔직한 소감을 털어놓았다. 그 한마디가 그날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기차역에서 벗을 배웅해주고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밖으로 내다본 풍광 속엔 가지각색의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러 빛깔로 수 놓인 서울 시가지가 화려하단 생각도 잠시, 삶의 중간에 놓인 쉼표처럼 컴컴한 어둠이 내린 한강은 그 너비만큼 깊은 포근함을 줬고, 그런 한강을 무심코 바라보며 그때까지 명색으로만 서울시민이었을 뿐인 기자는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서울 곳곳을 돌아다녀야겠다고, 앞서간 많은 이들의 숨결이 담긴 장소를 방문하고, 삶을 일과 고민으로만 점철하지 않겠노라고 옹골진 결심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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